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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고의 무사 척준경

디지털데이터 2020. 4. 2. 02:00

우리나라 최고의 무사 척준경

드라마 '도깨비'에 등장하는 고려 무장 '김신'은 실존 인물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모델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 장수가 있다. 또한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의 등장인물 '척사광'의 스승으로도 알려진 무사가 있다. 그는 고려와 여진족과의 전쟁에서 종횡무진한 한국사 ‘최강의 맹장’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무력만 놓고 볼 때 그와 비교할 수 있는 인물은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 1세, 중국의 항우, 여포라고 알려진 그의 이름은 바로 '척준경'이다.

 


그는 고려시대 곡주 향리의 아들로 집이 가난하여 여렸을 때 공부를 하지 못하였다.  무뢰배들과 어울렸던 '척준경' 그러나 1107년 윤관이 여진을 정벌할 때 척준경이 큰 공을 세우게 된다. 무술이 뛰어나 마치 신화 같은 기록들이 많이 남아있다. 오늘은 그 기록들을 알아보고 그와 관련된 재밌는 일화를 마지막에 설명하려고 한다. 

 


국경선까지 남진한 여진족들을 정벌하기 위해 고려에서 임간을 파견했다가 임간이 대패하여 군진이 무너졌을 때 당시 중추원 별가였던 척준경이 홀로 말을 타고 돌격하여 여진 선봉장을 참살하고 포로로 잡힌 고려군 200명을 빼앗아 왔었다고 한다.

 


윤관의 여진 정벌 당시, 여진족이 석성에 웅거 하여 별무반의 앞길을 가로막자 이에 부관이었던 척준경이 이르기를 '신에게 보졸의 갑옷과 방패 하나 만주시면 성문을 열어 보겠나이다'라고 호언하였다 한다. 그 후 척준경이 석성 아래로 가서 갑옷을 입고 방패를 들고 성벽으로 올라가 추장과 장군들을 모조리 참살하고 성문을 열어 성을 함락하였다고 한다.

 


윤관과 오연총이 8천의 군사를 이끌고 협곡을 지나다가 5만에 달하는 여진족의 기습을 당한 적이 있다. 고려군이 다 무너져 가기만 했고, 오연총도 화살에 맞아 포위된 위급한 상황에 척준경이 즉시 100 여기의 병력을 이끌고 달려왔었다. 이에 동생 척 준신이 "적진이 견고하여 좀처럼 돌파하지 못할 것 같은데 쓸데없는 죽음을 당하는 것이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척준경이"너는 돌아가서 늙은 아버님을 봉양하라! 나는 이 한 몸을 국가에 바쳤으니 사내의 의리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라고 소리치며 기합과 함께 100 여기의 기병과, 여진족의 후미를 돌파하기 시작하였다. 척준경은 단숨에 적 부관 참살하고 적장을 활로 쏘아 쓰러트렸다. 척준경과 10명의 용사들이 분투하여 포로를 구원하고 윤관은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여진족 보병과 기병 2만이 영주성 남쪽에 나타나 고려군을 공격할 준비를 했던 상황이 있었다. 윤관과 임언이 방어만 하려고 하자, 척준경은 단호히 반대하고 나섰다. "만일 출전하지 않고 있다가 적병은 날로 증가하고 성안의 양식은 다하여 원군도 오지 않을 경우에는 어찌합니까. 공들은 지난날의 승첩을 보지 않았습니까? 오늘도 또 죽음을 힘을 다하여 싸울 터이니 청컨대 공들은 성 위에서 보고 계십시오." 척준경이 결사대 100기를 이끌고 성을 나가 분전하여 적의 선봉장을 참살하고 적들을 패주 시킨 일화가 있다.

 


척준경이 방어하고 있던 성이 포위되고 군량이 다해간 적이 있다. 이에 지휘를 부관에게 맡기고 척준경은 원군을 부르기 위하여 사졸의 옷으로 갈아입고 홀로 적진을 돌파하여 원군을 부르고 당도하여 원군과 함께 성을 포위하던 여진족들을 격파하였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1126년 5월, 이자겸이 인종을 시해하려 수백의 사병을 동원하여 궁궐을 공격하기 시작한 적이 있다. 이에 한편으로는 인종이 달아날 것을 우려하여 자객 다섯 명을 어전(왕의 거처)으로 미리 보내 두었고, 어전 내부는 유혈이 낭자하여 내시와 궁녀들이 살해당하기도 하였다. 자객들이 인종을 시해하려 에워싸려 하자 인종은 대경실색하여 문밖으로 달아나려 하였다. 그 순간 어전 문이 통째로 박살 나며 한 거구가 손에 피 묻은 거대한 태도를 든 채로 숨을 가쁘게 쉬며 들어섰고 , 거구는 문 앞에서 놀란 표정으로 서 있는 인종을 향해 우레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고 한다.

 


" 폐하! 신 척준경이 왔사옵니다! "척준경의 갑옷은 이미 한차례 전투를 벌였는지 넝마가 되어있었고, 투구는 고사하고 상투가 잘려 봉두난발이 되어있었다. 척준경은 즉시 인종을 등 뒤로 숨기고 자객들에게 달려들어 두 명을 베어 넘기고 삽시간에 나머지 세명 모두 죽이고 인종을 구하였다. 

 


하지만 이 내용에는 씁쓸하면서 재미를 불러줄 만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이야기 훨씬 전에 척준경이 윤관의 목숨을 구해준 뒤로 윤관이 그를 아들같이 여겼고, 척준경은 여진 정벌에서의 공으로 고속 승진을 하게 된다. 그 후 출세하게 되었던 척준경의 딸과 이자겸의 아들이 결혼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자겸과 척준경은 사돈지간이었던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부자 형제 사이보다 사돈 간의 정치세력 규합이 많았는데 척준경과 이자겸의 정치적 행보를 같이 하다. '이자겸의 난'을 일으키는데 이자겸의 난 이후 이자겸은 최고의 권력을 누리게 되지만 당시 여론은 궁궐에 불을 지르고 많은 사람을 죽인 척준경을 비난하게 되었다. 

 


이에 안 그래도 못마땅한 척준경이었는데 하필 사소한 곳에서 일이 커져 아까와 같은 어마어마한 일이 생겨 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내용인즉슨, 이자겸은 아들을 7명이나 두었는데 이 중 3남인 이지언의 하인이 척준경의 하인과 싸우다 이지언의 하인이 “네놈 주인은 임금 계신 곳에 화살을 쏘고, 대궐에 불을 질렀으니, 네 주인은 참형을 당하고 너는 관노로 끌려가야 한다!”라고 욕한 것이 척준경에게 전해졌다.

 


“주인이 대감이면 하인들도 주인의 위세를 빌어 거들먹거린다더니! 아이고! 하인이 집안을 말아먹네!”라는 말을 전해 들은 척준경은 이자겸의 집으로 찾아와 관복을 벗어던지며 다 그만두고 낙향하겠다고 펄펄 뛰었고, 이후 척준경과 이자겸의 사이가 나빠지기 시작하였다. 그 틈을 타 인종이 척준경을 회유하였고, 척준경은 인종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글을 올려 화답하게 되었다.

 


이에 인종은 척준경에게 군사를 주어 요샛말로 쿠데타를 시도하였다는 명목으로 이자겸을 붙잡게 했던 것이 아까의 그 일화의 숨겨진 내용이다. 이자겸은 붙잡혔으나 왕의 장인에다 외조부란 이유로 죽이진 못하고 영광으로 귀양 보내지게 된다.

 


이자겸은 귀양살이하면서도 찬역(簒逆)을 한 일이 없다며 뜻을 굽혀 비굴하게 살지 않겠다는 뜻으로 이자겸은 영광의 앞바다에서 잡힌 맛 좋은 조기를 진상하면서 자기가 ‘비굴’ 하지 않다는 뜻으로 굴할 굴(屈), 아닐 비(非)의 굴비(屈非)라고 이름 지어 임금에게 진상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자겸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죽었지만 이후 영광 굴비는 궁중 진상품이 됐으며 이것이 굴비의 원조라고 전해지고 있다는 재밌는 일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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