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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상륙작전 특수부대 8240부대 켈로부대

 

우리는 6.25 전쟁에 대해서 교과서와 영화 등을 통해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때 행해진 작전부터, 어떻게 되었는지, 왜 발발하였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중 전쟁의 끝맺음을 알리는 인천 상륙작전이 한국 전쟁의 판세를 완전히 바꿔놓았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알려지지 않은 사실도 많이 있다. 오늘은 그 부분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한다. 현재의 우리나라 특수부대를 만들게 되었던 상황부터 어떻게 변화되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인천 상륙작전의 실행에 앞서 몇 가지 난제들을 검토했었다. 가장 큰 난제 중의 하나는 261척에 이르는 군함들을 일시에 해안가로 보내기 위해 필요한 등대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조수간만의 차가 엄청나게 심한 인천 앞바다에서 야음을 틈타 대규모 상륙작전을 펼치기 위한 시간은 너무나 짧았다.

 


하지만 지휘부가 선택한 인천의 월미도는 여전히 적의 수중에 있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몇 명의 유격대원들이 상륙작전 직전에 월미도 앞 팔미도에 파견되었으며 이들은 팔미도를 지키고 있던 인민군을 격퇴한 뒤 등대를 점령했다. 지휘부의 상륙 명령을 받은 유엔군 군함 261척은 이 팔미도의 등대 불빛에 의지하여 월미도에 상륙하게 된다.

 


이때 팔미도에 미리 상륙하여 등대를 확보한 부대의 이름이 북한과 남한 지역 출신으로 이루어진 8240부대였다. 현재까지도 베일에 쌓여있는 한국 최초의 게릴라 특수부대 8240부대이다. 그들은  6.25 전쟁 당시 미국 극동군 특수전사령부가 한반도 전 지역에서 사용했던 특수부대이다.  일명 켈로, 동크, 울프 백 등으로도 알려져 있다.

 


8240부대의 최고 전성기 때는 최대 3만 여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되었던 부대원들은 대다수가 북한 지역 출신이었다. 말하자면 미 극동군 특수전사령부가 적의 후방에 조직한 게릴라 부대이다. 또한 북한 지역 출신자 위주로 한국에서 최초로 만든 특수부대가 8240부대인 것이다.

 


8240부대의 대표적인 활약상이 하나 더 있다. 때는 역시 한국전쟁이 한창인 1951년 남과 북은 화천 수력발전소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다. 발전소는 당시 한반도 최대의 전력을 생산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남과 북 모두 포기할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때 당시 유엔군에서도 최우선으로 탈환을 하라고 할 정도로 그만큼 중요한 곳이었었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던 일인지 거듭된 포격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의 탱크와 포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미군은 이를 이상하게 여겨 비행기로 촬영을 했지만 역시나 탱크와 포는 늘어나기만 했고, 유엔군은 북한이 그만큼 발전소에 목을 매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보고하고 공세를 점차 줄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늘어만 가는 북한군 전력에 의문을 품은 대원들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8240부대였다. 


8240부 대원들은 현지에 조사팀을 파견했고 조사 결과 적들의 증강된 화력은 가짜임이 밝혀졌다. 사진에 그럴듯한 탱크와 포로 촬영된 것이 모두 나무로 만든 가짜 모형이었던 것이다. 이런 첩보를 입수한 아군은 즉시 제6사단과 해병대 제12 연대를 파견하여 발전소를 완전히 점령한다. 치열한 공방 끝에 발전소는 완전히 남한의 수중에 들어오게 된다. 8240부대는 혈혈단신 적진에 침투하여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리고 후방을 교란하는 등 비정규전을 완벽하게 수행하게 된다. 이렇게 특수부대로서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전쟁에 크게 기여하게 된 8240부대이다.

 


휴전 직후인 1953년 8월 8240부대는 육군본부 산하의 8250부대로 강원도 지구 울프 지역 대장으로 활약하던 스라소니 교육대장 겸 부부대장에 의해 재탄생되었다. 그렇지만 전쟁 중에 많은 부대원들이 사망하거나 적의 후방에서 활약하다가 북한 지역에 그대로 남겨지게 된다. 6천여 명이 전쟁 중에 사망하고, 2천 명이 행방불명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들이 군인 이상의 군인 역할을 수행하고 누구보다도 처절한 희생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후에 국가로부터 전혀 보상을 받을 길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유는 하나, 비밀스럽게 게릴라로 움직이던 이들에게는 정식 군번과 정식 계급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대의 특성상 기록을 남기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도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조차 아는 이가 별로 없게 되었다.

 


그들의 실체를 정확히 아는 곳은 미 극동군 특수전사령부였다. 하지만 이것 마저도 미 1급 군사기밀로 최근까지도 알 수 없었다. 베일에 쌓일뻔한 8240부대가 다행히도 최근 8240부 대원들 가운데 그 전공이 인정되는 경우가 최근 생겨나고 있다. 이는 미군의 당시 작전명령서를 비롯한 일부 문서가 기밀에서 해제되면서 본격화된 현상이다.

 


등대 탈환 작전에 참가한 최희화 씨 역시 전후에는 민간인으로 복귀하여 생활하다가 참전 공로를 인정받지 못한 채 1971년에 사망했다. 하지만 최근 기밀에서 해제된 당시 미군 작전명령서에서 그의 이름이 확인되어 정부는 2014년 1월 그의 가족에게 화랑무공훈장을 추서 하게 된다. 

 


위와 같은 분들이 없었다면 현재 이러한 희망의 메시지도 전달받지 못했을 것이다. 군번도 없이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8240부대분들에게 감사를 드리며 글을 마치겠다. 현재의 특수부대를 만들게 되었던 8240부대의 의지는 아직도 국가의 힘으로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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