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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총 역사의 한 획을 긋다.

디지털데이터 2020. 3. 27. 00:49

권총 역사의 한 획을 긋다.

 

이전 포스팅 세계 최초의 발명가들 에서 소총이 개발된 내용이 있었다. 권총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아본다. 또한 그것으로 인해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들을 적어보려 한다. 지금의 권총은 화력도 사거리도 괜찮다. 하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못했다. 권총은 전투용이 아닌 호신용 무기로 군에서는 고급장교 같은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만 지급되었다. 상대적으로 사거리도 짧고 파괴력도 부족한 이 권총이 역사를 바꾼 계기가 있었다.

 


<링컨 암살을 위해 사용한 '데린저'> 영화 ‘007’ 시리즈 같은 첩보물을 보면 종종 손바닥보다 크기가 작은 권총이 등장한다. 여성들이 속옷이나 스타킹 등에 은밀히 숨겨 호신용으로 사용하는 깜찍한 권총이다. 지난 1825년 미국의 총기 발명가인 헨리 데린저가 만든 뇌관식 소형 권총을 기원으로 삼고 있다. 일반적으로 데린저 라 통칭된다. 권총은 휴대하기 편리한 무기지만, 그중에서도 데린저는 더욱 소지하기 편한 형태로 제작됐다. 종류가 워낙 다양해 일률적이라 말하기 어렵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41 구경 림파이어 탄을 사용하는 2 연발의 레밍턴 데린저다. 

 


하지만 총으로써 데린저의 성능은 낙제점에 가깝다. 유효사거리가 불과 5미터 내외고 그나마 정확도도 좋지 않다. 총이 작은 만큼 총구 속도도 상당히 느려서 시쳇말로 총알이 날아가는 것이 보인다는 비아냥거림까지 있을 정도다. 당연히 파괴력도 보잘것없다. 하지만 이런 볼품없는 권총이 역사를 바꾼 도구로 사용됐다. 

 


1865년 4월 15일 연극을 관람 중이던 대통령 링컨의 뒤통수를 향해 남부 지지자인 존 윌키스 부스가 한 발의 총을 발사했는데 이때 사용된 무기가 바로 데린저였다. 이 테러로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링컨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고 미국 사회를 점진적으로 개혁하려던 그의 비전도 함께 중단됐다.

 


 <안중근 의사의 'FN M1900'> 러. 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 더 이상의 장애물은 없었다. 곧바로 을사늑약으로 우리의 국권을 침탈하는 등 동양 평화에 커다란 위협이 됐다. 이러한 일본의 침략을 앞장서서 주도한 이가 이토 히로부미다. 연해주 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하던 안중근은 그를 제거하지 않고는 조선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지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기회를 노리던 안중근은 이토가 러시아 재무장관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을 방문하게 됨을 알게 됐다. 그는 침략의 원흉을 처단하기 위해 3 정의 권총을 휴대했다. 만일 사격이 불발되면 즉시 다른 권총으로 거사를 진행하려고 했을 만큼 철저하고 치밀한 준비였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7발의 총탄을 발사했다. 그중 3발이 열차에서 막 내린 이토에게 명중했다. 이토의 사살은 중국에서도 지금까지 업적을 찬양하고 기릴 정도로 위대한 전과였다. 이때 우려와 달리 제대로 작동해 거사를 성공으로 이끈 권총은 7.65mm 구경의 FN M1900이었다. 이 권총은 미국의 유명 총기 제작자인 존 브라우닝이 설계한 것인데, 특이하게도 미국이 아닌 벨기에의 FN사에서 생산이 이루어졌다.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우여곡절 끝에 극동의 독립운동가에게 전해진 FN M1900. 비록 작은 권총이었지만 항일 운동의 의지에 불을 댕긴 거대한 방아쇠가 됐다.

 


<1차 세계대전 지옥을 불러온 'FN M1910'> 안중근의 거사 직후인 1910년, FN사는 M1900을 개량한 신형 권총을 출시했다. 그것은 바로 FNM1910이다. 전작인 FN M1900의 기능과 디자인을 많이 수용했다. 게다가 사복 경찰이나 경호원들이 휴대해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크기와 무게를 더욱 줄였다. 또한, 스트라이커식 격발 구조를 사용해 발사 메커니즘을 단순화시켰다. 이후 독일의 발터 PPK 권총, 소련의 마카로프 권총의 개발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고 1983년까지 생산이 계속됐을 만큼 기계적으로 상당히 뛰어난 베스트셀러였다. 하지만 이 권총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유는 제1차 세계대전의 시작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제국의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를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인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암살했다. 당시 그는 암살에 FN M1910을 사용했다. 이 사건 한 달 후, 전 유럽이 편을 갈라 거대한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결국 장장 4년 동안 1,000만 명이 전쟁의 상흔 속에 생을 마감했다.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양자 대결로 끝날 사건이 어떻게 세계대전으로 비화했는지는 지금도 논쟁거리다. 물론 이처럼 거대한 전쟁은 이미 수많은 갈등 요소가 쌓여있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만약 세계전쟁의 도화선이 됐던 이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면 제1차 세계대전 또한 피해 갈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프린치프의 FN M1910은 거대한 유류고에 던진 불쏘시개 그 자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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