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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전쟁 발명가들

디지털데이터 2020. 3. 27. 01:09

세계 최초의 전쟁 발명가들

현재 전 세계는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많은 것이 변화하고 있다. 심지어 영화에서나 보던 무기들이 현실화되어 가고 있다. 그러한 기술들도 과거가 있기에 현재의 모습이 있는 것이다. 오늘은 현재의 전쟁 도구들이 과거에 어떤 위대한 발명가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확인해보는 시간을 가져 본다. 

 



<잠수함의 - 로버트 풀턴> 로버트 풀턴은 증기선을 발명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무기 발명가였다. 그는 증기선 못지않게, 기뢰와 잠수함 등 무기류의 발명에 열중했다. 최초의 잠수함 터틀호는 와인을 담그는 오크통으로 만들어졌다. 로버트 풀턴은 1797년 프랑스에서 세계 최초의 실용적 군용 잠수함을 설계하여 그것을 프랑스 총재 정부에 제안했다. 

최초의 잠수함이라고 불리는 터틀 호는 사실 운행도 불가능한 최악의 잠수함이었다. 그러나 풀턴이 설계한 노틸러스는 모든 면에서 달랐다. 노틸러스호는 특히 수평 안정타의 각도를 조절하여 잠항이 가능하였다. 또한 부상 시의 선체 각도를 조절하도록 설계를 했다.  이 부분은 현대에 있는 모든 잠수함이 채용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1812년 영미 전쟁 때, 뉴욕 항구를 지킬 세계 최초의 증기엔진 군함인 데몰 로거스 호를 설계를 했다. 충분히 당시의 무기 발명가 중 TOP을 차지할 만한 인물이었다. 
 
< 소총을 발명한 - 미하일 칼라니시니코프> 소련, 러시아의 군인이자 무기 설계자다. 그는 돌격소총 AK-47, AK-74를 개발한 것으로 유명하다.  AK-47은 전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있다. 개발된 지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수십 개의 나라에서 사용하고 있을 만큼 유명한 소총이다. 엄청난 신뢰성을 자랑하는 것으로 유명하며 온갖 극한 상황에서도 잘 작동되며 파괴력도 좋은 최고의 소총이라고 불린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소련군은 대전 말기 독일군의 신무기 MP-44(STG44)에 깊은 인상을 받아 그와 비슷한 신형 무기를 추후에 소련군 주력 개인화기로 삼을 계획을 세웠다. 이에 1946년도에 출시된 설계안들 중 칼라시니코프가 설계한 소총이 우수한 평가를 받게 되었다. 이에 소련군 제식 소총으로 채택되고 1947년 첫 배치를 시작하여 AK-47이라고 명명되었다. 

이 공로로 그는 1949년 스탈린 훈장을 수여받았다. 1951년에 육군 상사로 군을 전역한 후에도 이젭스크 조병창의 주임 설계관으로 일하면서 AK-47의 개량형 소총 AKM, AK-47을 베이스로 한 RPK 분대 지원화기, PK 다목적 기관총 등 소련군의 주력 총기들을 설계했다. 그의 업적을 기리는 복합시설에는 학교가 있고 학교 안에는 박물관이 있으며 퀴리 마을에는 그의 동상까지 있을 정도로 위대한 무기 발명가로 손꼽는다


 

<칼라시니코프의 유일한 라이벌 - 유진 스토너> AK-47의 개발자 미하일 칼라시니코프의 유일한 라이벌로 유진 스토너를 뽑는다. 유진 스토너가 개발한 총기는 AK-47과 함께 돌격소총계의 쌍벽을 이루던 M16이다. 나온 지 50년이 지났지만 현재도 각국에서 사용하고 있는 총기다. 스토너와 칼라시니코프는 자신들이 설계한 총기들이 가진 상반된 이미지만큼이나 정반대의 삶을 살아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칼라시니코프는 그의 총기 대부분이 그가 살아있을 적에 빛을 보았다. 자신이 설계한 총기를 통해서 사회적인 명망이나 명예 또한 남부럽지 않게 얻기도 하였다, 하지만 유진 스토너는 정작 본인에게 특허권 같은 게 일절 없어서 로열티 같은 것은 받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총기를 통해 딱히 부를 얻지는 못했다. 1997년 숙명적 라이벌인 AK-47과  M16의 발명가의 서로의 만남. 여기서 스토너는 AKM을 들고 있고, 칼라시니코프는 M16A 2를 들고 있다. 반면 스토너의 경우 그의 총기 대부분은 그의 사망 이후에나 빛을 보았고 자신이 설계한 총기를 통해서 사회적인 명망이나 명예를 얻지도 못했으나, AR-15의 대성공으로 인해 상당한 부를 얻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칼라시니코프도 소련의 지원으로 꽤나 부유하게 살았으며 유진 스토너도 현재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됐으니 두 거장은 같은 인생의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전차의 - 어네스트 스윈튼> 전차는 어떻게 탄생에 알아본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치열한 참호전 때문이었는데 '철조망→참호→기관총 진지→포병 진지'로 구성된 적 진영을 돌파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다. 고작 1m를 전진하는 데 5천 명의 사상자가 나기 일쑤였다. 1914년 전쟁 발발과 함께 어네스트 스윈튼(1868~1951) 소령은 영국 육군성의 종군기자가 됐다. 프랑스 전선 취재 중 영국군이 돌격하다 독일군의 기관총에 무수히 쓰러지는 참상을 지켜보고 새 무기의 필요성을 느꼈다. 

무한궤도 바퀴의 트랙터가 농촌에서 사용되고 있는 데 착안, 탱크의 아이디어를 냈다. 동력구동식, 방탄기능, 무한궤도 바퀴' 3가지 원칙을 제시했는데 오늘날 탱크의 모체가 되었다. 육군성은 이 제안을 무시했지만 해군장관 윈스턴 처칠이 채택하여 탱크가 제작됐다. 1916년 마크-1 탱크 49대가 프랑스 솜므 전투에 첫 투입됐다. 위력은 크게 없었지만 덩치 큰 쇳덩어리가 등장한 것 자체로 독일군을 공황상태에 몰아넣기에 충분하였다. 그 이후 프랑스군과 독일군은 앞 다투어 탱크 개발에 매달리게 되며 각종 탱크가 나오게 된다. 

  
<원자탄 - 오펜하이머> 미국의 핵물리학이며 인류를 공포로 몰아넣은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 맨해튼 계획의 책임자였다. 핵무기의 원리를 개발한 사람은 아인슈타인이다. 하지만 실제로 개발하여 사용된 사례는 오펜하이머가 최초다. 세계대전이 극으로 치닫으면서 일본은 진주만 공습으로 미 함대를 기습하며 선제공격을 하게 되었다. 이후 미국과 일본의 태평양 전쟁에서 승기는 미국 쪽으로 기울게 되는데 몇 번에 걸친 회담이 있었으나 일본은 항복 요구를 거부해 결국 핵무기가 실전 투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유야 어쨌든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그의 작품으로 인해 사망한 것이었다. 결국 오펜하이머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었고 전쟁 후 수소폭탄 제조에 반대하였다. 이로 인해 모든 공직에서 쫓겨나게 된다. 오펜 하이머는 엄청난 헤비 스모커인 덕분에 폐암으로 사망했다. 담배가 핵무기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아이러니다.

 

오늘은 세계 최초의 전쟁 발명가들을 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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